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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우리는 수많은 영상 콘텐츠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클릭 한 번으로 재미있는 영상과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시대죠.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영상매체 시대에도 여전히 '독서'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어야 할까요?
EBS 다큐멘터리 '책맹인류'에서 다루었던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통해 그 답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 속도 vs 이해: 빠른 읽기의 함정
정보 습득 속도가 중요해진 요즘, '빨리 읽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지신경 언어학 전문가인 남윤주 교수님의 실험은 빠른 읽기의 장단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눈은 단어를 따라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핵심 단어에 멈췄다가 다음 단어로 '점프(안구 도약)'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뇌는 눈이 멈춰 있는 동안 정보를 입력받고, 다음 단어로 도약하는 동안 앞서 받은 정보를 처리하며 깊이 있는 이해를 구축합니다.
반면, 빠른 읽기는 디지털 문자를 화면에 빠르게 제시하여 안구 도약 과정을 최소화합니다. 이 방식은 글 읽는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실험에서도 일반 읽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글을 읽을 수 있었죠.
하지만 '빨리 읽기'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용을 읽자마자 되묻는 단순한 질문에는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었지만, 추론하거나 나중에 내용을 다시 떠올리는 사후 회상 과제에서는 정답률이 크게 낮아졌습니다.
이는 글을 읽는 과정이 단순히 단어를 빠르게 훑는 것을 넘어, 배경지식을 활용하고 의미를 추론하는 복합적인 인지 처리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빠른 읽기는 이러한 깊이 있는 처리를 방해하여 내용을 '읽기는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2. 상상력의 차이: 책 vs 영상
그렇다면 영상매체가 넘쳐나는 시대에 독서는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가치를 줄까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김용찬 교사님의 실험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읽게 하고, 다른 한 그룹은 같은 내용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아이들에게 특정 장면을 상상하여 그림을 그려보게 하자 놀라운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 애니메이션 시청 그룹: 시각 자극이 강한 영상을 본 아이들은 애니메이션에 나온 샘의 모습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림에 수도꼭지를 그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나 핵심 키워드(보리수 나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 독서 그룹: 책을 읽은 아이들은 똑같은 샘을 그린 경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머릿속 스케치북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훨씬 다양하고 창의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리수 나무의 특징을 그림에 표현하거나, 인상 깊었던 장면을 더 깊이 이해하고 기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독서가 우리 뇌의 '정교한 정신 표상 구축' 과정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읽는 동안 우리는 등장인물의 모습, 배경, 사건 등을 능동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뇌의 신경 회로가 변형되며 상상력과 인지 능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반면, 영상은 이미 완성된 이미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뇌가 스스로 형상화할 기회를 줄어들게 합니다.
3. 독서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가치
독서는 또한 페이지를 스스로 넘겨야만 다음 내용을 볼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다음에 무슨 내용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은 상상력으로 이어지고, 이야기를 따라가며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복잡한 인지적 훈련을 하게 됩니다.
영상매체는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깊이 있는 이해,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복합적인 사고 능력은 여전히 '읽기'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기를 수 있습니다.
읽기는 인간의 뇌가 가진 기능을 총동원하는 기적적인 과정입니다. 글자를 읽는 매 순간, 우리의 뇌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신경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결론: 여전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영상매체가 아무리 발달해도 독서가 주는 고유한 가치는 퇴색되지 않습니다. 빠른 정보 습득을 넘어, 깊이 생각하고, 풍부하게 상상하며, 세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힘은 독서를 통해 길러집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중심을 잡고 나만의 생각과 시각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고 글자를 통해 세상을 만나야 합니다. 조금 어렵고 느리게 느껴질지라도, 독서라는 뇌의 근육을 꾸준히 단련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요?
자, 그럼 이제 함께 책 한 권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